징기즈칸은 인류 문명에 무엇을 남겼나?

징기즈칸(칭기스 칸, 1162~1227). 그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의 노마드(유목민) 사회에서 태어났지만, 마침내 동양과 서양에 걸친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이름은 수많은 전설과 극적인 서사를 품고 있으며, 그가 구축한 몽골 제국은 단지 영역의 확장에 그치지 않고, 문화와 정치, 경제, 심지어 종교에까지 파급력을 미쳤다. 다만, 오늘날에도 징기즈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서구 사회에서는 한때 “야만적 침략자”로 인식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몽골 제국이 실크로드를 안정시켜 동서 문명의 교류를 활성화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창시자로도 추앙받는다. 진실은 대체 어디쯤 있을까? 1. 초원의 아들, 테무친 1.1. 출생과 가계 징기즈칸은 원래 테무친(鐵木眞)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한 타타르 전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테무친이 태어났을 때 그의 손안에는 핏덩어리가 쥐어져 있었다는 몽골 전설이 있다. 이는 훗날 테무친이 이룰 '피어린' 정복의 운명을 예고한 징조처럼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신화적 요소와 별개로, 그의 어린 시절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었다. 예수게이는 부족 연합의 지도자 역할을 했으나, 테무친이 아홉 살 되던 해 독살당하고 만다. 어린 테무친과 가족은 부족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당시 몽골 초원은 분열된 부족 사회였고, 한 부족이 강성해지면 곧바로 다른 부족의 침략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테무친 일가는 그야말로 극심한 빈곤 속에서 유목 생활을 이어갔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테무친은 점차 주변 동료와 우호 세력을 모으고, 생존을 위해 전략적 동맹과 배신, 전투를 경험하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1.2. 소년기의 전쟁과 배신 테무친에게 있어 가장 큰 변화는 결혼이었다. 그는 보르테와 결혼하면서 보르테의 부족 쪽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계속되는 전쟁과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