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음 속의 피멍 — 영화 <Laugh Killer Laugh> 평론
1. 개요 🎭
<Laugh Killer Laugh>(감독: 카말 아흐메드)는 **“웃음이 허락되지 않은 자의 잔혹한 자서전”**을 표방하는 네오‑느와르 범죄 드라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성적·신체적 학대를 겪은 프랭크 스톤(윌리엄 포사이스)은 “웃음이란 특권층의 전유물”이라는 주술적 명령 아래 성장한다. 영화는 ⌜웃음 금기⌟라는 독특한 전제를 통해 **폭력·트라우마·구원**을 엮고, 창작 행위를 ‘자기 서사의 재구성’이라는 치유 도구로 제안한다. 감독은 플래시백·내레이션·창문 프레임 샷을 빈번히 배치함으로써 프랭크의 내면과 범죄 세계 사이의 단절감을 시각화한다. 또한 **기억의 파편성**을 반영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창작 수업 장면 → 범죄 수행 장면’의 교차 편집을 반복,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
주요 인물로는 프랭크를 경제적·정서적으로 조종하는 마피아 보스 ‘터프 토니’, 창작 수업 동료이자 유일한 정서적 연결 고리 ‘재키’, 그리고 프랭크의 트라우마 원형을 체현하는 ‘고아원 교장’이 있다. 이들은 **폭력(토니)**, **치유(재키)**, **원죄(교장)** 라는 삼각 구도를 이뤄 프랭크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인력(引力)을 형성한다.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다. “인간은 과연 과거의 학대를 넘어 자기를 재작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프랭크의 선택과 실패를 통해 응시한다. 영화 속 웃음과 피의 대비, 타자와의 관계 맺기 실패, 그리고 타자(재키)의 죽음이 불러온 각성은 이 질문에 대한 서늘한 대답인 동시에 관객에게 던지는 역설적 희망이다. 🌑
2. 줄거리 📜
영화는 고아원 장면으로 포문을 연다. 교장은 아이들에게 “웃음은 죄”라고 선언하며 벌거벗은 권력을 행사한다. 프랭크는 채찍을 맞고도 웃음을 삼킨 채 살아남지만, **“행복은 상류층의 사치”**라는 저주가 뼛속에 각인된다. 성인이 된 그는 마피아 조직의 청부강도이자 “감정 없는 프로”로 악명을 떨치며, 토니에게서 고액 의뢰를 받아 다이아몬드 거래상을 털고 동료를 처리하는 냉혈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연히 등록한 **창작 글쓰기 수업**에서 그는 ‘오스카 키셀’이라는 가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내고, 동료 수강생 재키는 그 글에 공감하며 다가온다.
프랭크의 **이중생활**은 곧 파국을 예고한다. 조직은 그의 글이 ‘실제 작전 폭로’일 수 있다며 살해 명령을 내리고, 동료 갱스터 비니가 프랭크를 트렁크에 가둔다. 그러나 경찰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프랭크는 병원에서 깨어난 뒤 **“이제 웃어도 된다”**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본능적 폭력성에 당황한다. 토니는 킬러 ‘루시퍼’를 고용해 프랭크를 쫓고, 재키는 토니 일당에게 납치·살해된다. 재키의 죽음은 프랭크 내부에서 **복수와 속죄의 스위치**를 동시에 작동시키고,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토니의 심복들을 제거한 뒤 보스를 결판 짓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랭크는 재키의 딸을 찾아가 어머니의 사랑을 전하고, 자신에게 없는 ‘미래’를 아이에게 건네며 사라진다. 영화는 이렇게 ‘웃음’이라는 금기를 해체하고 “폭력으로 태어난 자가 타인의 안녕을 위해 웃음 짓는 역설”을 완성한다. 🌧️
3. 챕터 1 – 학대의 씨앗과 냉혈의 탄생 🌱
초반부는 프랭크가 왜 ‘웃음 없는 괴물’이 되었는지 정교하게 누적한다. **고아원 교장은 자신을 “하느님”**에 빗대며 체벌·성폭력을 일삼고,😈 아이들에게 “웃음은 연극”이라는 독설을 주입한다. 프랭크가 떠안은 최초의 메시지는 **“사랑받을 자격 불가”**이며, 그는 이를 현실화하려 조직 범죄라는 비정(非情) 구조 안으로 뛰어든다. 토니가 들려주는 “잠자기 전 아버지의 악당 동화”는 **가정적 애정의 부재**를 다시 각성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렇듯 영화는 **가부장·종교·교육**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성 권위’로 규정짓고, 프랭크의 무감정 범죄를 사회적 산물로 위치시킨다.
또한 프랭크는 동료 강도들의 ‘더블 크로스’를 예견하고 선제 제거함으로써 **“신뢰는 사치”**라는 생존 공리를 확정한다. 이 장면들은 빠른 컷과 어둡게 채도 빠진 톤으로 편집돼 프랭크의 감각마저 탈색된 세계를 반영한다. 그러나 글쓰기 교실 입장 순간, 카메라는 **따뜻한 키 라이트**로 전환하여 ‘감정 회귀 가능성’을 암시한다. 즉, 챕터1은 프랭크를 ‘폭력/무감정’이라는 단일 축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창작이라는 변수가 투입될 여지를 남겨 후속 갈등의 모판을 마련한다.
4. 챕터 2 – 감정 폭발과 파멸의 굴레 ⚡️
중반부는 **글쓰기 수업**이 촉발한 자기서사 쓰기가 프랭크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그린다. 가명 ‘오스카’를 쓴 프랭크는 “밤이 알지 못한 어둠이 그의 영혼”이라며 자신의 범죄 일지를 낭독하고, 수업 동료 아클리와의 충돌·재키의 지지 속에서 **“타인이 내 목소리에 반응한다”**는 생애 첫 경험을 맛본다. 이는 학대된 영혼이 언어를 통해 증언 주체로 이동하는 장면으로, 영화의 **심리적 클라이맥스**다. 하지만 이 서사적 ‘고백’은 반대로 조직에게 누설 가능성이라는 위협으로 해석된다. 토니는 “가족 사진”을 강요하며 프랭크의 고독을 조롱하고, 이는 프랭크에게 두 번째 굴욕을 각인시킨다.💣 :
갈등은 경찰‧병원‧코미디 클럽을 오가는 **정체성 혼란 시퀀스**로 폭발한다. 코미디언에게 모욕당한 뒤 폭소를 터뜨리는 프랭크는 ‘웃음 금기’가 실제로 파괴되었음을 몸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같은 시간대, 조직은 재키를 납치·살해하여 “프랭크의 웃음은 곧 타인의 죽음”이라는 잔혹한 인과를 제시한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웃음·울음·비명** 사운드를 불협으로 믹싱해, 관객의 감정 좌표를 의도적으로 혼란시킨다. 결과적으로 챕터2는 프랭크가 **감정을 표현할 자유**를 얻는 동시에 **감정이 부른 대가**를 치르는 아이러니를 구축한다.
5. 챕터 3 – 복수, 구원, 그리고 웃음의 역설 🎇
후반부는 복수극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웃음’이라는 이물질을 삽입해 장르 공식을 교란한다. 킬러 ‘루시퍼’ 고용, 빈 공장 격투, 병실 추격 등 액션 장면마다 프랭크는 **과장된 폭소**를 터뜨려 상대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이는 어린 시절 교장이 휘두르던 ‘웃음 금지’ 규율을 거꾸로 극대화한 **카니발적 전복**이다. 토니와의 최종 대면에서 프랭크는 “필요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망가뜨린 죄”를 되갚는다며 “응징의 천사”를 자처한다. 피가 튀는 와중에도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고, 카메라는 슬로 줌‑아웃으로 이 초현실적 웃음을 강조한다. 결국 복수는 완수되지만, 영화는 **폭력이 폭력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숨기지 않는다. 프랭크는 재키의 딸에게 “엄마가 널 사랑했다”는 메시지를 남긴 뒤 프레임 밖으로 소멸한다. 🌅 이 엔딩은 **“웃음의 주체는 새로운 세대”**라는 불완전한 희망이며, 관객에게 선택의 책임을 전가한다
6. 총평 📝
<Laugh Killer Laugh>는 **트라우마‑느와르**라는 독자적 영역을 개척한다. 프랭크 스톤이라는 캐릭터는 “학대→폭력→고백→복수”라는 4단 변주를 거치며 ‘웃음’의 의미를 전복한다. 그는 끝내 구원을 완전히 체험하지 못하지만, **“타인에게 남기는 인정(acknowledgement)”**이라는 최소한의 윤리를 획득한다. 감독은 이를 통해 “피해자가 가해자 되기를 거부할 최후 선택지”를 제시한다. 🔄
연출적으로는 어두운 톤의 로우키 라이팅, 1940년대 느와르 대사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내레이션, 그리고 **타자화된 웃음**의 음향 디자인이 시너지를 낸다. 다만 3막에서의 과도한 서브플롯(경찰·코미디 클럽)은 호흡을 분산시켜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날카롭다. “웃음은 과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기폭제인가?” 관객은 프랭크의 웃음 속에서 두 가능성이 공존함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