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생애에 걸친 국가관의 변화

 

1. 서론: 혁명과 제국의 교차로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세계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여 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유럽 대륙을 새롭게 재편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국가관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 지방의 독립적 정체성을 간직한코르시카인이었고, 혁명기에는 공화주의적 이념에 공감하거나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으며, 종국에는 황제의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은 한 개인의 야심과 시대정신, 그리고 대규모 전쟁이 얽혀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칼을 들고 결단력을 보이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살았던 시기는 유럽 전체가 근대 국민국가 개념을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군주제의 절대 권력을 무너뜨리고국민 주권이란 개념을 전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사람들은 안정된 통치를 원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그 갈망을 포착해질서를 통한 자유를 강조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통치 모델을 제시하며 유럽의 역사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 글에서는 나폴레옹의 개인적 배경, 군사적 성공, 혁명 이념 수용과 왜곡, 제정 시기의 통치 철학, 그리고 최후의 회고까지를 아우르며 그의 국가관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코르시카의 아들: 초기 정체성과 출발점

2.1. 코르시카 출생의 역사적 배경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의 아작시오(Ajaccio)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그 전까지 제노바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768년 조약에 의해 프랑스에 할양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무렵 코르시카에서는 프랑스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파스콸레 파올리(Pasquale Paoli)를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의 가문 역시 파올리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이는 어린 그가 자연스레 코르시카의 독립심과 민족성을 학습하는 환경에 놓이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나폴레옹의 정체성에 큰 흔적을 남겼다. 비록 훗날 그는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유년 시절에는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기보다코르시카인으로 인식했고, 프랑스어보다 코르시카 방언을 더 편하게 구사하였다. 이런 경험은 그에게민족혹은자치와 독립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 주었는데, 이는 훗날 그가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국가 체제를 구상할 때 배경으로 작용하는 요소가 되었다.

2.2. 프랑스 유학과 군사 교육

나폴레옹은 어린 시절부터 학업을 위해 브리엔유(Brienne) 신학교와 파리의 에콜 밀리테르(École Militaire) 등 프랑스 본토의 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군사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기존 유럽 질서를 비판하는 계몽사상, 공화주의 사상 등을 접하게 된다. 특히 프랑스어를 제대로 익히며 프랑스 사회의 주류 문화에 발을 들이는 데 성공했으나, 한편으로는외국 출신으로서 받는 차별과 소외감도 남아 있었다. 이런 이중적 경험은 이후 그가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하는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말 타고 있는 나폴레옹

당시 프랑스 사회는 구체제(Ancien Régime)의 모순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신분 간 특권과 불평등이 만연해 있었다. 나폴레옹처럼 귀족 가문이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고, 게다가 지방(코르시카) 출신인 젊은 장교는 기존 질서에서 빠르게 승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곧 닥친 프랑스 혁명이 이러한 사태를 바꿀 계기를 제공했다. 혁명은실력에 따른 등용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고, 나폴레옹은 바로 이 기회를 포착해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입증하여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3.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공화주의적 이상 vs. 정치적 실리

3.1. 혁명 이념의 수용과 출세의 발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나폴레옹은 이를 여러 측면에서 주시했다. 한편으로는 절대왕정과 봉건적 특권을 무너뜨리고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를 내건 혁명 정부가 자신에게 더 큰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빠르게 군사적·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실리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는 혁명 정부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귀족 출신이지만혁명에 협력하는 유망한 젊은 장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실제로 혁명기 프랑스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유능함을 입증할 기회를 얻었다.

나폴레옹이 혁명에 호응한 데에는 분명 신념적인 부분도 있었다. 계몽사상과 공화주의적 가치에 대한 호감, 그리고 구체제의 구습을 혐오하던 그는현대를 열어갈 새로운 질서의 창출에 매력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혁명의 이상이 제공하는 기회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했으며, 이것이 급부상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양면성이념적 지지와 실리 추구은 이후 그의 국가관 전개 과정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3.2. 이탈리아 원정과 민족 해방자 이미지를 향한 시도

1796,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지역은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오스트리아 하브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쳤다. 나폴레옹은 이 원정에서 빠른 속도로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영웅처럼 부상했고,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오스트리아와 구체제를 타파해 줄 해방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애썼다.

그는 원정 도중에도국민 주권자유를 표방하며 자신을혁명의 전도사로 포장했다. 프랑스 혁명이 지향하는 공화주의적 질서를 이탈리아에 확산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이탈리아 각지에서 대중의 호응을 어느 정도 이끌어내는 전략을 썼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사적·재정적 이득을 챙기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결국 점령지에서 강탈이나 징수 등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이탈리아 원정은 나폴레옹 국가관의 독특한 이면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민족과 자유라는 이상을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프랑스의 패권 확장과 자신의 입지 강화라는 매우 현실적인 목적에 봉사했다. 그는 늘조국(프랑스)을 위해 내가 싸운다라고 말했으나, 그 조국이혁명의 공화국인지, 아니면자신이 세우려는 강력한 통치 기구인지는 점차 모호해져 갔다.


4. 통령 정부 수립과 제정으로의 전환: 강력한 권력 집중의 국가관

4.1.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와 통령 정부

1799,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사양길에 접어든 총재 정부(디렉투아르)를 무너뜨리고, 사실상 최고 통치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1통령(First Consul)’의 지위를 얻어 프랑스 정치를 사실상 독점했고, 이를 통해 중앙집권적 구조를 강화하는 데 나선다. 이 시기부터 나폴레옹의 국가관은 종전의공화주의적 대의정치를 지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질서를 우선시하는 강력한 통치자의 역할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 체제를 유지한다고 강조했지만, 나폴레옹에게 권력은 점점 집중되었으며 각종 제도 개혁도 그의 명령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관료제, 행정구역 개편, 교육 제도 정비, 금융 제도 혁신 등근대 프랑스의 골격이 되는 개혁이 이 시기에 다수 실행되었다. 이는 혁명기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나폴레옹 개인에게 막강한 지배력을 안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4.2. 황제 대관(戴冠)나폴레옹 제1제국의 출범

결국 1804,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거쳐 스스로를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7세 앞에서 열린 대관식은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왕이나 황제는 교황의 손에 의해 관을 받아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나폴레옹은 교황이 건네준 관을 직접 자신의 머리에 씀으로써스스로에 의한 대관을 선언했다. 이는황제의 권위가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의사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부여된다는 메시지를 유럽 전역에 발신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봉건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성(神聖) 권위보다혁명개인적 자질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새로운 통치 모델을 내세웠다. 동시에, 절대적인 권력 집중을 통해강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 국가란지도자의 역량에 의해 조직적으로 운용되고, 국민들이 질서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체제여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듯 나폴레옹의 국가관은 구체제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혁명적 공화주의와도 거리를 점점 두게 되었다.

4.3.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과 제도적 통합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한 이후 가장 두드러진 업적 중 하나가 바로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 정식 명칭은 Code Civil)이다. 이 법전은 프랑스 혁명 직후부터 논의되어 온 여러 법률 초안을 집대성한 것으로, 봉건적 특권과 신분제의 흔적을 지우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법 제도로 확립했다. 이는 개인의 소유권 보장, 계약 자유의 원칙, 결혼과 가족 제도에 관한 새로운 규정 등을 통해 근대 민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나폴레옹 법전은 훗날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의 법 체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혁신적 제도이지만, 동시에 황제권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 법 앞의 평등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정치권력은 황제의 지시와 의지에 크게 좌우되었으며, 과도한 집중을 허용하는 구조였다. 나폴레옹의 국가관에서는국가란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공간이되,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합할 수 있는 강력한 통치자와 관료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났다.


5. 유럽 대륙의 전쟁과 팽창: 해방자에서 정복자로

5.1. 대륙 지배의 목표와 민족주의의 역설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무대로 한 전쟁을 벌이며 프랑스의 지배권을 확대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등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강대국들과 연이은 충돌이 벌어졌고, 승리를 거듭하며 한때 유럽 대륙 대부분이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나폴레옹은유럽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해 근대적인 질서를 구축한다라는 이상을 표방했지만, 실제 정책은 정복지의 자원을 수탈하고 대규모 징병으로 군사력을 유지하는 형태가 강했다.

이 과정에서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나폴레옹이 도입한 혁신적 제도와민족개념을 활용한 통치 방식은 오히려 각 지역에서 고유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등은 나폴레옹을 통해 구체제를 타파하는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나, 동시에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강화했다. , 나폴레옹의 제국 건설은 단순한프랑스화()’가 아니라, 각 지역이 근대 민족주의에 눈뜨는 과정을 가속화한부메랑이 되기도 한 것이다.

5.2. 제국주의적 지배와 혁명 이념의 퇴색

나폴레옹은 초기에는해방혁명을 외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복자, 침략자, 전제 군주라는 이미지가 짙어졌다. 그의 대규모 원정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소모했고, 점령지에서는 프랑스군의 점령 정책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또한 혁명정신이 강조했던민주적·공화적 거버넌스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황제권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혁명 당시의자유와 평등구호는 점차 빛을 잃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자신을전 유럽에 근대적 제도를 전파하는 개혁가로 묘사하곤 했다. 이는 정복사업에 대한 내부와 외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였으며,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그의 행정·법률 체계 도입은 전 유럽에 근대 국가질서의 기초를 깔았고, 일정 부분낡은 질서의 붕괴를 촉진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에게는한 절대군주의 지배로부터 또 다른 절대권력자의 지배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감이 커졌다.


6. 몰락과 유배: 말년에 비친 자기 정당화와 국가관

6.1.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쇠퇴

1812년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 제국의 전성기에 결정적인 균열을 일으켰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은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광활한 영토, 러시아군의회피 전략으로 인해 제대로 된 결전을 벌이지도 못한 채 보급로가 끊기고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1813)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결국 1814년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함락되자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만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한때 전 유럽을 호령하던 황제에서 하루아침에 유배지의 섬으로 쫓겨난 지도자가 되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왕정이 일시적으로 복원되었고, 나폴레옹이 구축했던 제도 상당수가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다시 한 번백일천하(1815)’를 열었고, 최종적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보내져 남은 생을 보냈다.

6.2. 세인트헬레나에서의 회고와 자기 정당화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말년을 회고록 집필과 구술에 매진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업적을유럽에 근대적 질서를 뿌리내리고, 봉건 왕정과 귀족적 특권을 해체한 과정으로 강조하며, 자신이혁명의 계승자이자 발전자로서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했다. 또한, “민족주의의 태동과 근대 시민사회의 성숙은 결국 나의 유산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물론 이는 자기합리화의 성격이 짙었지만, 유럽 역사에서 그가 수행한 역할을 어느 정도 반영하기도 한다.

그가 말년에 남긴 수많은 언급과 회고는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폴레옹 자신의 정의를 다시금 드러내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강력한 통치 구조를 갖춘 근대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되,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지도자의 권위가 필수적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녹아 있었다. 이는 혁명적 공화주의, 민주주의의권력 분산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고, 오히려행정력 집중을 통해 근대화를 추구한 모델이었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말년에 이르러내가 한 모든 일이 유럽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단계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그의 팽창정책은 엄청난 인명 희생과 고통을 초래했고, 각 지역 민족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어 대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나폴레옹이 이룬근대화는 의도하지 않은 형태로 각국에서 자생적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시켰고, 이후 19세기 중후반 유럽이 국민국가 체제로 재편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7. 결론: 나폴레옹 국가관의 유산과 모순

나폴레옹의 생애에 걸친 국가관 변화를 살펴보면, 그것은 크게 다섯 가지 흐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코르시카 정체성과 지방적 독립심
    어린 시절부터 코르시카의 역사와 문화, 독립 운동 지도자 파올리의 영향 아래에서 자라면서, 나폴레옹은민족성자치의 개념을 직간접적으로 습득했다.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를이방 권력으로 여기기도 했으나, 군사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프랑스 체제 안에서 자신의 활로를 모색했다.
  2. 프랑스 혁명과 공화주의의 이념
    혁명이 가져온 사회·정치적 격변은 나폴레옹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혁명 이념자유, 평등, 박애에 어느 정도 공감했으나, 이는 그의 군사적 성공과 정치적 상승에 활용된 측면이 크다. 혁명은 그에게 신분제의 장벽을 뛰어넘을 기회를 주었고, 그는 군사적·정치적 능력을 입증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3. 통령 정부와 황제 즉위를 통한 권력 집중
    1799
    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그는 공화정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사실상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1804년 황제에 오르면서 국가란나폴레옹개인의 권력 및 카리스마에 의해 통합되는 존재로 바뀌었고, 혁명 시절의 민주적 이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나폴레옹 법전 등 근대적 제도 개혁은 혁명 정신을 제도화한 진일보라 평가되나, 동시에 황제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4. 유럽 대륙 팽창과 민족주의의 역설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적 정복은 한때민족 해방자로 추앙받게 했으나, 결국 각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프랑스 지배에 대한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통해 혁명 이념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지만, 그 자신은 점점정복자로 낙인찍히며 이상적 명분을 잃어갔다.
  5. 몰락과 자기합리화: 근대 국가의 선구자?
    말년에 유배지에서 그는내가 유럽에 근대성을 안착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했고, 실제로 봉건적 전통 타파와 법·제도 혁신 등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순수한 공익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많은 이들의 희생이 따라야 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나폴레옹은 개인적 야망과 시대의 요청, 그리고 혁명 이념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체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국가관은공화주의에서 출발해 제국주의로 귀결되었다는 단순한 도식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복합적이다. 본질적으로는강력한 국가를 통해 근대적 질서를 확립한다는 신념이 일관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혁명 이념과 충돌하거나, 때로는 이를 이용하면서 커다란 권력과 제국을 일구어냈다.

프랑스 혁명 후유증을 수습하고 근대국가의 체계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유럽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나폴레옹 법전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법률적·사회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관료제와 교육 제도 정비는 국민국가의 틀을 한층 더 공고히 했다. 반면, 무리한 원정 전쟁과 독재적 통치는혁명의 아이가 결국 혁명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모순적 평가도 피하기 어렵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나폴레옹의 국가관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을 상징하는 복합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 편으로는국가가 주권을 가진 시민의 집합체라는 혁명적 이상, 또 다른 편으로는유능한 통치자가 안정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구() 전제주의적 유산이 혼재한 모습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합쳐져, 그는 스스로국민의 뜻에 의해 선출된 황제라는 모순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럽 무대에서 전대미문의 권력을 휘둘렀다.

최종적으로 나폴레옹이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강조했던나는 민족들에게 각성의 기회를 주었고, 봉건 왕가를 몰락시켰다라는 주장은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의 통치가 유럽 각지에 도입한 법률·행정 체계와 혁명 이념은 이후 19세기 내내민족자유라는 기치를 내건 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근대 국가가 형성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 출발이 엄청난 전쟁과 폭력, 독재적 권력 행사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은 근대사를 수놓은 대표적인영웅이자 동시에폭군’, ‘이념의 기회주의자로 다면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의 국가관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나폴레옹을근대 유럽의 정치를 한 단계 도약시킨 천재적 혁신가로 추앙하고, 또 다른 이는대규모 살육전과 전 유럽에 걸친 폭력적 점령을 감행한 제국주의자로 비판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그 짧았던 생애 동안 국가의 역할과 통치 구조에 대한 거대한 실험을 실행했고, 이를 통해 봉건제 이후의 새로운 국가 모델을 가시화함으로써 19세기 이후 유럽의 국민국가 체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결국 나폴레옹의 생애는한 개인의 야심이 어떻게 역사적 격변기의 이념 및 제도와 맞물려, 국가의 형태를 뒤바꿀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사례다. 그의 생애를 통찰해 보면, 국가란 언제나 특정 이념과 권력 관계가 결합하여 변형될 수 있으며, 개인의 천재성과 시대적 분위기가 맞아떨어질 때 그 변형의 폭이 놀랍도록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나폴레옹의 국가관이 단순한 혁명 이념의 배신으로 치부될 수 없고, 동시에 오직 제국주의적 욕망으로만 환원될 수도 없는 이유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복합적 주체로서, 나폴레옹은 끝없이 변화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국가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위 논고는 나폴레옹이 가진 국가관의 변화를 시간 순으로 추적함과 동시에, 그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야망, 그리고 시대정신이 어떻게 상호 작용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를 요약하면, 그는 코르시카인으로서 지방적 독립심을 지녔으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군사적·정치적 야망을 펼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황제의 권력과 법전 제정을 통해 국가를 중앙집권적 통치 기구로 규정했다. 그러나 동시에민족근대라는 개념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유럽 전역에서 전통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족국가 형성을 자극한역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러한 복합성이야말로 나폴레옹의 국가관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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